사순절에 찾은 화해의 십자가(엡 2:13-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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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찾은 화해의 십자가(213-18)

성경본문:에베소서 2:13-18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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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나의 십자가 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4)

착각의 십자가와 복음의 십자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심각한 오류 중에 하나는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들은 초대교회에서 동일하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막힌 담을 헐어버리기 위해서 인데,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담을 쌓고 있다면 잘못된 것이죠.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이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것은 십자가를 아느냐?’는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로 허물어뜨린 벽들로 인해 우리들에게 온 화평은 무엇인지 묻지 않으실까요?

우리가 복음의 십자가를 알면 허물어야 할 담이 보이는데, 착각의 십자가를 보면 변화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복음의 십자가를 보면, 화목을 위해 우리가 내 놓아야 할 것이 보이는데,착각의 십자가를 보면, 그저 상대방의 허물만 보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가야지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뎌야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이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가난이 한 때 방탕하고 사치해 생긴 것인데, 그렇게 해서 생긴 가난을 십자가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몰론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명한 잘못과 실수로 야기되는 고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착각의 십자가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착각의 십자가는 고난은 고난이되 신앙 때문에 얻게 된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죄로 인해서 생긴 고난입니다.

반면 복음의 십자가는 신앙을 버리면 겪지 않아도 될 불이익과 고난이지만 순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맞게 되는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져야할 십자가는 착가의 십자가가 아니라 복음의 십자가입니다.

오늘 보문 14절을 보세요.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중간의 막힌 담

은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는, 가로 막혀서 소통이 되지 않는 것,또 하나는, 넘어야할 혹은 극복해야할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죠.

결국 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숙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말씀 가운데 우리가 조용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담을 쌓고 살아가는지, 왜 우리는 막힌 담을 허무는 일을 두려워하는지.

저에게 있어서 사람들이 담을 쌓는 이유는 자기 방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자기 방어를 하는 이유는 상대방으로 인해 당하게 될 위협을 막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가 중국에 있는 만리장성입니다. 진시황제가 그 오래전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이 놀라운 기적 중에 하나로 보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만리장성을 보면서 진나라의 강함을 자랑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방의 모든 나라를 오랑캐로 치부하고 적으로 돌린 진나라가 가진 두려움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이 지금 힘을 가지고 있어도 사방의 모든 것들이 적이니 두려움으로 인해 쌓은 담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담은 모든 사람을 원수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증거일 뿐입니다.

결국 누군가를 한 형제와 자매로 보지 못하고 원수와 적으로 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담이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며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저는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복음의 십자가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인간들의 원초적인 이기심을 이기고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조차도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그 분 앞에서 우리가 용납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죠.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신지요?

박찬호 선수LA 다저스에서 잘 나가던 시절 샌프란시스코 팀과 경기를 하다가 몸에 맞는 볼을 던진 것이 시비가 되었습니다. 결국 양 팀이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박찬호 선수가 좀 과다하다 싶을 만큼 반응을 보였습니다. 상대방 선수를 이단 옆차기로 가격했고 싸움 후에 징계를 받게 된 것이지요.

나중에 기자들이 물었을 때,“이 바닥에서 한번 밀리면 끝장이에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결국 살아남으려면 약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약해 보이면 공격의 목표를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강해지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는 연약함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강해지려고 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 그런데 이 연약함을 이기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절망감을 느끼고, 강해지려는 욕망들과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참으로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영원한 강자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쌓아 놓은 그 강함이라는 것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진시황제는 제국을 통일하여 불안한 마음에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면도해 주는 이발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발사를 쓸 때 신원조회를 무척이나 철저하게 했다고 하지요.

우리는 주변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장 강한 것 같지만 가장 연약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결국 화해로 인해 화목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약함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누군가의 강함도 우리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고, 부활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간 가장 큰 은혜는 약함으로 인해 우리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약함도 자랑하게 됩니다. 더 이상 그 약함으로 인해 우리가 넘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약함으로 인해 더 이상 우리는 방어의 담을 쌓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저의 경험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제가 만나교회 담임목사가 되고 가졌던 가장 큰 두려움은 약함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담임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강하게 보일까?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약점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두려움이었죠.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큰 축복인 것은 두려움으로 인해 십자가 아래 나가게 한다는 것이죠. 십자가 아래서 기도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마음은 약함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약함을 드러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일하는 장로님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일은 약함을 감추기 위해 강한 척 하며 위선적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늘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담을 쳐야 한다는 것이었죠.

제가 목회를 하면서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목사님은 너무 솔직해요라는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까지 자신을 드러내야 하나요? 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깨닫게 된 것은 솔직한 것이 제 모습이고,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쓰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부족함이 단점이 아니라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되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학력과 경력 과거를 숨기고 위조한 사람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봅니다.

대개가 더 높은 위치에 가기 위해 속이는 사람들이죠, 그 정도 위치에 가려면 이 정도의 경력과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나를 그 정도의 위치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 큰 것이 아닐까요?

제 목회에 있어서 참 좋은 경험입니다.

일 년에 한번 당회를 할 때면,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실수에 대한 것이죠.

그런데 당회를 하면서 제가 잘못한 것을 누군가 지적할 때, 아니라고 변명하기 보다는.

참 그렇네요. 제가 잘못했네요. 어떻게 하죠?”라고 말을 하면,잘못을 지적한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가지고 있고, 친절하게 말해 줄 때가 참 많다는 것이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지적은 잘못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십자가 아래서 죄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십자가의 이야기를 하면서 화목을 이야기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대한 담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조항으로 인해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들이 한 없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모든 법조문들을 지킬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십자가 아래서 그 담이 허물어 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 어떡하죠?’ 라고 물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는 하나님과 원수된 것입니다.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이 생긴 것이죠.

그런데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 담을 허물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 죄를 십자가로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원수였으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 되지 않고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죠.

이제는 우리의 무거운 짐들을 우리가 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그 짐을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출처 미상의 글인데 좋아서 소개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죠.

참아야 하는 까닭

내가 불쾌한 사람을 참아주어야 하는 까닭은 누군가도 불쾌한 내 모습을 참아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아내고 남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하는 까닭은 누군가도 나의 허물을 참아주고 덮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끝없이 기다리고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누군가도 나를 끝없이 기다려주고 사랑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누군가도 나를 용서해주었기에 그 빚을 갚는 것입니다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평생의 빚이 있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도 포기하지 않고 쏟아주신 그분의 사랑 그 사랑의 빚이 나에게 사는 의미를 조용히 일깨워줍니다

출처미상

화해와 용서의 이야기

화해와 용서의 이야기는 늘 우리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 자신이 용서하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용서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용서야 말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의 담을 허문 우리는, 그래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간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고 용납하고 화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에서 불의와 정의 그리고 죄와 선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여 친구가 되는 순간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준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을 보세요.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해결하신 화평과 허물어진 담은 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 말씀을 듣는 자들 중에는 유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과 멀리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누군가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차이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땅에 모든 이들을 위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스캇 솔즈가 쓴 [예수님처럼 친구가 되어 주라]에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벽을 쌓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에서 흔히 있는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인데, 인종주의를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종주의를 극복했어요. 나에게는 흑인 친구도 많아요.”

그러자 한 흑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흑인 친구가 많다는 말을 하지 말아주세요. 단지 나를 친구로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흑인친구가 많다는 말은 인종주의를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인종으로 인한 벽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참 많은 마음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 적어도 반 이상의 국민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부활절에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하는 십자가는 한 없이 넓은 마음으로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수직으로 내려온 나무에 수평을 뻗은 십자가는 접점이 없습니다.

한 없이 올라가고, 한 없이 넓어질 따름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벌리신 예수님의 손은 끝없이 펼쳐진 광대함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그 어떤 것도 포용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을 보세요.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오늘 우리가 방문한 제주의 모슬포 교회는 벽을 허물고 용서하신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모슬포 교회는 19099이기풍 목사님이 대정읍에 있는 신창호의 집을 교회로 정해 예배를 드리므로 시작되었습니다.

모슬포 교회의 2대 목사인 윤식명을 통해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1918년 법환리에서 복음을 전하던 윤목사는 당시 신흥종교인 태을교(보천교) 신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왼쪽 팔이 불구가 됩니다.

하지만 윤목사는 그 일로 인해 목포로 압송되는 태을교도 60명을 용서해 다라고 군인들에게 간청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전통은 8대 담임자였던 조남수 목사에게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4.3 사건으로 인해 제주가 사상적으로 양분되어 있던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입니다.

194811월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이 대대적으로 전개돼 마을의 95% 이상이 초토화 됐습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가족 중 젊은 사람이 없어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부르며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재판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 사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입산한 무장대들에게 가족들은 쌀과 돈, 옷과 양말 같은 것들을 내주었는데, 대부분 선량한 주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한 일을 고백하고 자수해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 목사가 자수를 권고하는 강연에 뛰어들었습니다. 19481125일이었습니다. 조 목사는 모슬포 경찰서 서장 문형순으로부터 자수자에 대해서는 죄의 유무를 불문에 붙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자수 선무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조남수 목사 문형순 대장과 함께 경비대의 허욱 대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경비대장의 명령으로 상모, 하모, ·서일과 4개 리 6,000여 명이 광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에 허욱 대장이 신분 안전을 보장하겠노라고 하여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허욱 대장조남수 목사에게 자수 권유 계몽 활동을 맡겼습니다.

조남수 목사19481125일 경비대장과 그의 부하들이 자리를 비켜 준 가운데 5,000~6,000명이 모인 군중 앞에 섰습니다. 강연자와 청중이 같이 눈물을 흘림으로써 상호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조남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들이 자수하지 않을 경우에 당하게 될 처참한 모습을 묘사한 후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조 목사는 강연회에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의 주소와 성명이 기재되어 있는 명단을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 명단에 기명된 사람들의 생명은 어쩌면 시간문제만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대로 자수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불문에 부치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자수하였다가 그분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죽임을 당하면 나는 여러분 앞에서 할복할 것을 약속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믿고 자수하십시오. … ​나는 기독교 목사입니다. 내가 강연회 폐회를 선언하고, 군중에게 자수할 사람은 내 뒤를 따르십시오.”

첫 강연에서 100여명이 자수를 하고 처형을 면하자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이후 한림, 화순, 중문, 서귀포 지역 등에서 총 150회에 걸쳐 강연을 했습니다.

그 결과 2,000여 명이 자수함으로써 희생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판 쉰들러가 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제주는 4.3 사건에 대한 진정한 해결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직도 이 문제는 제주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거대한 벽으로 존재 합니다. 그래서 외지 사람들이 제주에서 4.3사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습니다.

1996넌 하모리에 세워진 조남수 목사 공덕비는 4.3과 관련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손재운 모슬포교회 목사가해자와 피해자만 있던 상황에서 조남수 목사는 기꺼이 화해자가 되어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 요즘은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참다운 화해를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조 목사님의 정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우리들은 원수된 것을 소멸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다시 보세요.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찢기셨습니다.

원수된 것을 소멸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흘리는 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원수된 것을 소멸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원수된 것을 소멸하기 위해 십자가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화목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우리가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원수된 것을 소멸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을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그리고 피를 흘려도 하는 것입니다.

1970년 서독의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를 공식 방문 했을 때의 일입니다. (사진)에 나와 있는 장면인데, 무명용사의 묘를 참배할 때의 일입니다. 이 묘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바르샤바케토 희생자 추념비도 함께 있었습니다.

대개 한 나라 원수가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의례히 있는 의전 행사였죠.

그런데 갑자기 브란트의 모습이 기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수상의 보좌관들은 브란트 총리가 과로로 쓰러진 줄 알았습니다.

그는 쓰러진 것이 아니라 한동안 비에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폴란드 침략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이들의 명목을 빌었습니다.

어떤 기자는 후일 이 날 브란트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무릎 꿇을 필요가 없는 그가 무릎 꿇을 필요가 있는, 그렇지만 무릎을 꿇지 않는 모든 사람들 대신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감히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거나 감히 그렇게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기자의 지적처럼 사실 브란트는 나치의 만행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17세 때부터 사회민주당원이었던 그는 나치라는 극우 정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치 치하이던 193319세의 어린 나이에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일찍부터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치에 맞섰던 브란트가 나치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입니다.

다음 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마우트 하우젠 강제노동수용소의 생존자인 요셉 키라키예비츠 폴란드 수상은 브란트를 포옹했습니다. 이 바르샤바에서의 참배는 브란트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값진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귀도 크놉(독일의 언론인겸 역사가)의 지적처럼 브란트가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그 어떤 행동보다도 세계에 독일을 도덕적으로 복권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무릎 꿇는 용서로 인해 독일은 주변국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했고, 결국 동서독이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화해의 십자가를 누군가 짐으로 인해 일어난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또 부활절을 지날 때면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십자가 그 사랑 - 중창

1.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무너진 나의 삶 속에 잊혀진 주 은혜

돌 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2.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이전에 행한 모든 일 생각지 않으리

사막에 강물과 길을 내시는 주 내 안에 새 일 행하신 주만 바라봅니다

후렴)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오늘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에서 찾아야 할 화해의 십자가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에서 막혀진 담, 그래서 허물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제 다시 오늘 본문 말씀 18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느낌으로 이 말씀이 다가오나요?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에게는 이 말씀이 벅찬 감격과 기쁨으로 느껴집니다.

십자가로 모든 원수된 것을 소멸한 감격 같은 것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양면성이 아닐까요?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 십자가를 짐으로 인해 우리가 맛보는 화해와 평안의 복음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울면서 기뻐한다든지 맞으면서 기뻐한다든지 굶으면서 기뻐한다든지 죽어가면서 기뻐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참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기쁨들인데 바로 이와 같은 선상(線上)에 사순절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이 되는 것은 아픈 것입니다. 그런데 기쁜 것입니다.

화목제물이 되는 것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해가 이루어지는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경쟁자나 적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약함을 품어주기 위해 우리도 아낌없이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들 이라는 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어리석어 보이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기쁨이 있는 것처럼, 먼저 화해하고 용서하는 우리가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십자가의 삶을 살았다는 감격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나 부활에 이르는 여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화목하고 화해하는 지점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희생과 사명도 화해하지 않는 한 이기적 결단에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해하지 않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중심적 신앙에 머물러 자기만족을 느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철없는 신자에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다시 찾은 화해의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큰 부담이고 기쁨이며 커다란 도전입니다.

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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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찾은 화해의 십자가(엡 2:13-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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